교육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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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서
read 4314 vote 0 2008.10.24 (19:17:34)

아이들이 좋아하는 세계

좋아하는 것은 표현의 동력이 된다. 물리적 힘을 두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가치 평가를 하지는 않는 것처럼, 표현의 모티브에도 윤리적인 기준을 가져와서는 안 된다. 아이가 표현하는 내용과 실제 생활을 연결하여 동일한 기준을 들이대면 표현이 경직되고, 결국 더 깊은 미적 도전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표현의 내용을 보고 그 가치를 판단하기보다, 모티브로부터 얼마나 더 깊이 미적 본질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편이 낫다. 예술가는 그가 다루는 내용에 의해 자신의 창조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작품의 내적 완결성에 의해 자신의 창의적 가치를 드러낸다. 내용의 가치판단은 창조성을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놀이터, 아파트, 학교 - 일상과 추억이 좋아

어른들의 일상은 온통 지루함으로 채워졌지만 아이들의 일상은 신비함으로 가득 차 있다. 집과 놀이터, 유치원과 학교, 그리고 때때로의 여행과 모험은 아이들의 정서가 자라는 곳이다. 모든 기쁨과 슬픔, 기대와 두려움이 그 곳에서 싹튼다. 생생한 경험이 아이들로 하여금 보다 풍부한 정서의 지도를 그려낼 수 있도록 해준다.

 

창조적인 사람일수록 사소한 일상에서 웃음과 감탄과 희망을 발견한다. 아이들도 자신의 일상에 감추어진 신비를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새롭고 진기하고 놀라운 것을 찾으려면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은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우는 편이 낫다.

 

많은 어른들은 평소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잘 살피는 노력을 쏟지 않다가, 비싼 장난감을 사주거나 기묘한 영화를 보여주거나 낯선 여행지에 데리고 가는 것으로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 보면 아이는 흔한 놀이터나 산책길에서 비싼 장난감보다 더 재미난 것들을 찾아서 가지고 놀기도 하며, 매일 오가는 길에서도 멀리 있는 명소보다 더 기막힌 장면을 발견해내기도 한다.





곤충과 식물, 동물 - 자연이 좋아

풍요로운 자연은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이자 스승이며 가장 다정한 친구이다. 자연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은 그로부터 생명의 가장 고귀한 덕목을 길러간다. 그것은 생명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 사랑이다. 가장 연약한 것에서 용맹한 것까지, 자세히 보아야만 발견할 수 있는 작은 것으로부터 멀리서도 보이는 거대한 것까지, 그 모든 것 속에 자신만의 풍요로운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것은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유려한 선과 다양한 형태의 조합, 그리고 화면의 활력을 주는 리듬감 등 조형의 중요한 감각들은 어떻게 자라는 걸까? 동물이나 식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형태와 움직임 등을 자발적으로 탐색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 의문이 다소 풀린다. 많은 아이들이 사슴벌레, 호랑이, , 나무, 꽃과 풀 등을 잘 그리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 아이들은 수많은 열정적인 드로잉을 통해 점차 자신만의 조형감각을 탄탄하게 형성시켜간다.

 

요즘 사람들은 자연과 동떨어져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여기지만, 아이들의 상상과 표현이 자라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여전히 자연은 문명의 원동력이라는 걸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어머니이자 스승으로서 자연을 더 자주 더 밀접하게 접촉하려고 한다. 그러한 열망을 채워주는 환경만으로 교육은 활기를 얻을 것이다. 아이들이 자연의 품에서 조화와 아름다움과 같은 생명의 속성을 간직하면 창의의 너른 영토를 향해 나아갈 큰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공룡과 괴물 - 상상의 세계가 좋아

상상과 판타지는 아이들의 세계를 지탱해주는 커다란 한 축이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마치 아직 땅에 발을 디디지 않은 천사들처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가상의 이미지를 가지고 노는 것에 있어서 아이들은 언제나 최선의 예술가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괴물은 아이들의 유희 속에서 익살스런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두려움마저 친근하게 바꾸어버리는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은 상상과 자유의 영역을 뛰어다니며 날 저무는 줄도 모른다.

 

괴물, 마법, 판타지의 세계는 상상의 자유를 허용한다. 얼마나 똑같은지, 얼마나 정확한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자유로울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만으로 아이들에게 참으로 다행이다. 그렇다고 이 세계가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평소에 발견한 것,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 혹은 선뜻 시도하지 못하는 이미지를 판타지를 통해 얼렁뚱땅 익살스런 비빔밥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거칠고 강한 것이 좋아 – 남자들의 세계

어디에서라도 막대기 하나만 주우면 칼싸움 하겠다고 휘두르기 시작하는 못 말리는 남자 아이들. 이 못 말리는 사내아이를 걱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어머니를 자주 보곤 한다. 젊은 어머니가 남자아이를 받아들이기는 여간 해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랜 세월 수 많은 세대에 걸쳐 전달된 남자들의 상징을 이 꼬맹이 사내아이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대륙을 누비며 용맹을 떨치던 광개토대왕, 무시무시한 드래곤과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기사의 신화는 미지의 우주를 향해 치솟는 우주선 비행사, 혹은 그 어떤 악당도 두려울 것 없는 로봇 조종사로 새롭게 각색되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세계는 겉으로는 힘들이 뻗어 나와 서로 부딪히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움직임과 역동성, 혹은 기계적인 견고함과 같은 조형적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데 기여한다. 총과 칼, 전투기와 탱크, 그리고 싸움과 전쟁 등은 남자아이들이 조형적 본질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이끄는 동력이 된다.





예쁘고 귀여운 것이 좋아 – 여자들의 세계

여자아이들은 세상에 숨어 있는 화사한 색을 끄집어내는 신비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사물들을 온화하고 다정다감하게 바꾸는 마법사들이다. 동시에 꽃과 같은 화려함과 백조와 같은 우아함을 사랑하는 동화 속의 공주들이다. 섬세함, 세련됨, 풍성함, 온화함이라는 정원은 여자아이들에 의해 창조되고 가꾸어진다.

 

여자아이들은 숨어 있는 세상의 모든 감정들과 은밀히 교감하는 마법사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상상의 이야기들이 펼쳐지며,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 듯 그 느낌들을 고스란히 자신의 표현으로 승화시킨다. 예쁜 옷을 입고 있는 소녀의 우쭐함, 선물 받기 전의 설렘, 슬픔에 잠긴 어떤 남자의 슬픔 등을 선명한 색으로 그려낼 수 있는 섬세한 감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오르내리는 약수터의 시원한 바람, 우아한 나비의 날갯짓, 아침 인사를 건네듯 지저귀는 발랄한 새들이나 열심히 먹이를 나르는 힘겨운 개미들에도 자신의 감정을 불어넣을 수 있다.

 

여자아이들이 고집하는 화려한 핑크색과 공주의 판타지는 우아한 선과 화사한 색채, 장식적 표현과 섬세한 스토리와 같은 조형적 본질로 이끄는 출입구이다. 그들은 이 모티브들을 가지고 무감한 세상을 채색할 미묘한 조화에 대한 감각을 성장시킨다.



   
자동차와 비행기, 로봇 - 인공물이 좋아

기계! 움직이는 인공물들은 자연과 상상이라는 두 세계의 중간지대에 걸쳐 있다. 자연의 풍부함은 수많은 영감으로 우리를 자극하고 인간은 자신의 방식으로 자연을 담아낸다. 인간과 로봇, 말과 자동차, 고래와 화물선, 상어와 잠수함, 독수리와 비행기…… 아이들은 사람이 만든 것을 통해서 자연을 추상화하는 상상력을 키워간다.

 

직선, 네모와 세모, 그리고 동그라미 등 이렇게 단순한 것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만들 수 있는가! 아빠 엄마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여행갈 때 탔던 비행기나 기차, 내가 사는 방, 책상, 컴퓨터, 집과 건물들, 그리고 블록이나 로봇 같은 장난감들은 자연에 없는 직선과 곡선, 원들로만 이루어졌다. 자연에서 추상해낸 이러한 기본 단위들을 결합하고 쌓고 반복하고 변형하여 새롭게 창조된 것을 담는 그릇이 문명이다.

 

아이들은 인공물을 마음에 담고 그것을 표현하면서 문명의 일원이 될 준비를 한다. 온갖 편리함을 누리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는 그 자체로 아이의 삶 속에 깊게 베어있다. 자연은 아름다움에 대한 영감을 주고, 문명은 그것을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가져오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워준다. 사람에게 즐거움과 편리함을 주는 이 모든 직선과 곡선의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자연의 정수로 다가가는 에너지를 충전할 것이다.


 
만화와 게임, 캐릭터가 좋아

대중문화는 전통적인 예술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겼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일군의 예술가들은 그들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새로운 예술의 동력으로 삼았다. 아이들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 없다. 실제로 만화와 게임 등 TV나 웹에서 만들어지는 단순하고 명료하며 도식화된 이미지들은 아이들 표현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아이들이 더 높은 수준의 미적 감수성을 갖게 해주려면 그들이 즐기는 문화의 수준 자체를 높여줘야 할 것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더 폭넓고 수준 있는 놀이 문화를 제공해줄 의무가 있다. 이런 노력이 없이 단지 막고 빼앗는다고 해서 더 나은 미적 수준이 달성될 리가 만무하다.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는 아이들이 딛고 일어서야 하는 토대이다. 아이들이 즐기는 것 자체가 표현의 동기가 된다. 동기는 부추기는 힘일 뿐이다. 그 내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순하고 질 낮은 대중문화의 이미지들을 창조적으로 변형해낼 가능성이 아이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수동적인 소비에 머무르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미지를 변형하고 재창조하는 아이들의 왕성함에 지지를 보낸다.





                                                                                  (강성일 이경아샘과 함께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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